노동자의 교육 이야기 두 번째

자녀와의 대화 어떻게 할 것인가?

 

김태균(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상임대표)

 

무엇을 가지고 [노동자의 교육이야기 2]를 쓸까 고민했었다. 서울 청계천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반쪽 등록금 쟁취 투쟁에 대해서 아니면 사상 초유의 본부 건물을 점거하고 있는 서울대학교 법인화 반대 투쟁에 대해서 글을 쓸까? 이도 저도 아니면 요즘 새로운 사회 만들겠다는 동지들의 이야기 하고 있는 교육 관련한 내용에 대해 글을 써 볼까? 과연 어느 주제가 우리 노동자들에게 가장 현안으로 다가 설까? 라는 고민을 하면서 말이다.

고민하는 와중인 얼마 전 중학교 1학년과 3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에게 상담 전화가 왔었다. 상담의 내용인즉 현재 막내딸인 중학교 1학년 아이가 여자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해 병원에 입원 치료를 요 할 정도로 정신적, 육체적 상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피해 학부모는 학교에 이 상황을 알리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구했고, 3명의 가해 학부모들을 만나 가해 학생들의 전학을 요구했다고 한다. 다들 알다시피 현재 중학교는 의무교육으로 규정되어 있어 학교나 교육청에서 퇴학이나 출교를 결정할 수가 없으며 해당 학생이나 학부모가 동의를 해야지만 전학이 가능한 구조이다.

피해 학부모의 적절한 조치 및 가해 학생들의 전학 요구가 있었고, 이후 학교 측에서는 학생 폭력 관련한 회의를 통해 가해 학생 3명에 대해 1주일간 봉사활동을 결정하고, 가해 학부모들은 전학을 못가겠다고 버티는 상황에서 갑갑함을 느껴 피해 학부모가 상담을 요청해 온 것이다.

피해 학생의 학부모의 요구는 피해 학생이 가해 학생들과 같은 교실에서, 같은 학교에서 함께 있는 것조차 피해 학생이 불안해 한다는 것이며,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요구한 것인데 사건을 축소 은폐하기에 급급한 학교와 자신의 자녀가 다른 학교로 전학 가는 것이 싫은 가해 학부모들에 의해 사건 발생이 몇 달이 흐른 지금도 피해 학생은 가해 학생과 함께 한 교실에서 공포에 휩싸여 생활을 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내용이다.

이번 학생 왕따 관련한 피해 학생의 학부모로부터의 상담을 받으면서 이러한 상황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과연 우리 노동자 학부모들은 이런 일들을 겪게 되면 어떻게 대처할까 ?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자녀를 만날 때 과연 어떻게 만남을 가질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필자 스스로 해 보면서 이번 [노동자의 교육이야기]자녀와의 대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써보자 라는 생각을 하였다.

 

자녀들을 대하는 부모들의 일반적 모습은 어떠할까?

흔히 부모들이 자녀들을 대하는 모습은 자녀들을 하나의 인격체이기 보다는 보호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가끔 자녀들이 반항을 하면 사춘기로 간주하고, 나의 자녀는 최소한 욕설도 안하고 거짓말도 안한다고 생각에 자녀를 대할 것이다.

 

한 가지씩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 보자.

우선 자녀를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보호의 대상으로 대하는 모습에 대해서부터 이야기 해 보자.

어린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children 이라한다. 서양의 중세시대에 children이라는 낱말은 주로 시종, 숙련공, 군인 등 계급 사회에서 지위가 낮은 남자를 칭했던 말이라고 한다. 18세기까지 서양에서는 children이라는 말은 다양한 계층에서 누군가에게 인사할 때, 누군가를 쓰다듬을 때, 어떤 일을 시킬 때 사용했던 말이며 하나의 인격체로서 동등하나 크기만 차이나는 사람을 칭할 때 쓰였던 말이다.

조선시대 서당 교재로 사용되었던 동몽선습 중에 부모가 사랑하면 기뻐하여 잊지 못하고, 미워하면 두려워 할뿐 원망하지 않고 부모가 노하여 때려서 피가 흘러도 감히 원망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을 기대한다.” 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도 어린이 또는 청소년을 크기가 다른 똑 같은 인격체로 규정을 했었다.

청소년에 대한 이러한 규정이 서양의 경우 18세기부터 동양의 경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아동, 청소년의 관념이 바뀌기 시작했다. 즉 크기가 다른 동등한 인격체에서 성인이 보호해야 하고 보호할 수밖에 없는 인격이 미성숙한, 아직 인간이 덜 된 존재로서의 아동, 청소년으로 그 존재 관념이 바뀌었다.

왜 아동과 청소년의 관념이 바뀌었을까? 동등한 인격체에서 덜 성숙한 존재로서의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관념이 바뀐 이유는 무엇일가?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로서 아동과 청소년을 규정할시 통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즉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성인과 다른 무엇, 소위 아동 혹은 청소년으로 규정함으로써 성인이 안정적으로 통제 할 수 있는 존재로 규정하고자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아동, 청소년에 대한 관념이 변화한 것이라고 규정하면 과도한 판단일까?

자녀들이 반항을 하게 되면 부모들은 흔히 사춘기가 되어서 그래라면서 자녀들의 의사 표현을 폄하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사춘기라는 개념을 정리해 보자면 신체의 성장에 따라 성적 기능이 활발해지고, 2차 성장이 나타나며 생식기능이 완성되기 시작하는 시기로 흔히 규정 한다. 이 규정에 따르자면 아무리 길어도 사춘기 시절은 3개월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사춘기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대학 다닐 때 까지 즉 10세부터 20세 전후로 한 10여년의 기간 동안 사춘기라 부르는 기이한 현상이 있다.

필자가 학부모 단체에 있어서 많은 학부모들과의 상담할 기회가 있다.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자녀와의 관계 때문에 상담을 청한 학부모가 우리의 아이가 사춘기가 빨리 왔나 봐요. 괜히 부모에게 반항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요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나서 바로 대학 다니는 자녀가 있는 학부모가 상담이 와도 똑 같이 우리의 아이가 늦게 사춘기가 왔나 봐요라고 하면서 자녀들이 무언가 이야기 하고 싶다는 표현을 사춘기로 간주하고 방치하는 모습을 많이 보곤 한다.

한국에서 사춘기가 이렇게 긴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청소년들이 무언가 전달하고자 하는 문제제기를 함께 고민하고 풀기 보다는 방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비 청소년(성인/학부모)들이 핑계거리를 찾다 보니 나온 한국판 사춘기가 아닐까.

물론 이러한 청소년들에 대한 비 청소년(성인)들의 태도는 유독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째든 크기만 다를 뿐 하나의 동등한 동격체로서의 청소년들이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성인이라 불리는 비 청소년들이 보호라는 미명하에 청소년들을 통제 혹은 방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춘기개념을 왜곡 동원하고 나아가 청소년 = 미성숙개념을 확산 시키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듯 하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 보자

흔히 부모들은 우리의 자녀가 욕설이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한다. 최소한 나의 자녀만은 그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 속에 살아간다.

이러한 부모들의 희망(?)을 무참하게 깨는 설문조사가 있었다.

한국교원개발원이 지난 201010월 한 달 동안 서울, 전남, 충남 지역의 초중고교 학생 1,260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바가 있다. 조사 대상 학생 중 68명인 5,4%의 학생만이 일상생활 중에 욕설을 전혀 쓰지 않는다, 라고 답변을 하였다. 반면 매일 한번 이상 욕설을 사용한다는 학생은 설문 대상 학생 중 925명인 73.4%나 되었다. 결국 이 설문 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의 학생이 일상적 용어로 욕설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웃긴 사실은 위 통계치로만 보면 내 자녀는 욕설을 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학부모는 68명의 학부모들뿐인 셈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청소년들이 욕설을 일상적 용어로 사용을 하는 것일까?

삼성의 이건희와 삼성 노동자 중 누가 더 욕설을 잘할까? 현대의 정주영이와 현대 노동자 중 누가 욕설을 더 많이 할까?

답은 분명하다. 부르주아 계급으로서의 이건희와 정주영 보다는 삼성의 노동자, 현대의 노동자가 더 욕설을 많이 한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욕설은 분노의 표현이다. 무언가 억눌리고, 욕설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 갈수 없기에 욕설을 하는 것이다.

결국 청소년들이 일상적 용어로 욕설을 사용한다는 것은 현재의 청소년들이 처해 있는 현실이 청소년들에게 도저히 욕설이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 갈수 없게끔 하기에 욕설을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를 해 보자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까? 자녀들을 부모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까? 아니면 부모와 자녀 중 누가 더 거짓말을 많이 할까?

이 질문에 대다수 우리 노동자들은 우리의 자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지 않다. 부모에게는 학원 간다고 하면서 친구들과는 피시방을 가는 우리의 자녀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렇게 거짓말 하는 자녀들이 자신의 친구들에게도 피시방 가면서 학원 간다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결국 자녀들이 하는 거짓말은 부모로부터 맞지 않기 위해서 하는 거짓말이다. 친구에게는 동일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충분히 알 수가 있다.

역으로 부모도 자녀들에게 거짓말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거짓말이 나는 너 만 했을 때 공부 열심히 했다라는 거짓말일 것이다. 부모가 하는 거짓말은 자녀가 부모에게 하는 거짓말처럼 자녀에게 맞지 않으려고 하는 거짓말은 아니다. 부모가 하는 거짓말은 부모라는 지위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거짓말이다. 보통 부모의 권위(?)나 머 그런 거 말이다.

자본가들이 하는 거짓말과 노동자들이 하는 거짓말도 비슷하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거짓말이고, 노동자가 하는 거짓말은 맞지 않으려고 죽지 않으려고 하는 거짓말인 것이다.

 

결국 크기만 다른 또 다른 인격체인 청소년을 미 성숙된 존재로 사춘기라는 개념까지 왜곡 동원해서 통제하고자 하는 비 청소년(성인)들이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거짓말로 인해 우리의 자녀들은 이틀에 한 명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겪고 있는 것이다.

 

08년 보건복지부에서 14,716명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는데 이중 78.2%의 청소년들이 성적이나 진로, 진학 등의 문제로 부모와의 갈등이 있다는 답변을 하였다. 또한 36.7%의 청소년들이 가정문제로 21.0%의 청소년들이 학교 문제로 가출을 생각해 본적이 있다고 답변을 하였다.

물론 약간 오래된 통계이고 정부기관의 통계이다 보니 객관성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정부 기관조차 청소년들이 부모와의 갈등에 대해서 그리고 이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가출이라는 도피 등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모이자 비 청소년(성인)인 우리들에게 시사해 주는 점이 많다는 생각이다.

 

조금 더 청소년들의 삶을 들여다보자.

학교생활 그리고 가정생활 그리고 이외의 약간의 사회생활로 청소년들의 하루 일과는 구성이 된다. 물론 노동자들의 삶 또한 별반 차이는 없다. 어째든 이중 가장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학교생활을 하는 청소년들은 크게 4가지 부류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살인적인 경쟁에서 살아남는 길이 유일한 길이라고 해서 기를 쓰고 1등이 되기 위한 학교생활을 하는 이, 그리고 그냥 그렇게 남들 다 다니는 학교 나도 다닌다 하듯이 다니는 이들, 도저히 시장화된 학교, 경쟁의 교실에서 버티지 못하고 학교를 떠나는 탈학교 이들, 그리고 그것도 벅차고 힘들어 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

한국의 청소년들의 모습이다. 나의 자녀는 과연 어디일까?

 

우리는 일상적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만나면서 부모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보통 남성 노동자의 경우 교육 문제는 여성(어머니)의 문제로 치부하고 그냥 단지 아버지는 꼬박 꼬박 월급 잘 가져다주면 역할을 다 한 것으로 간주한다. 여성의 경우는 학교 어머니회 정도 잘 나가고 아이들에게 숙제 같이 해 주고 남들처럼 방과 후 학원 잘 보내면 부모로서의 역할을 잘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것들은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물론 이도 맞벌이 부부나 홀로 자녀들을 키우는 노동자의 경우 약간은 다르지만 크게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부모들은 자녀들을 미 성숙된 통제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자녀들의 문제제기를 반항과 질풍노도의 시기라 불리는 한국판 사춘기로 간주하면서 방치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녀들의 삶인 학교생화, 가정생활, 그리고 사회생활에 있어 가능하면 1등을 했으면 하고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그냥 그렇게 평범하게 생활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이러한 생각 속에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만난다.

이러한 생각 속에 자녀들을 만난다면 결국 자녀들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문제제기를 하겠지만 이 또한 사춘기로 치부되면 문제제기가 올곧게 논의가 되지 못할 것이다.

사측의 비인간적인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의 유연화 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조합원들을 만날 때 우리는 경쟁에서 혼자만 살아남을 것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회피하자는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함께 노동조합의 이름으로 투쟁 할 것을 제안하고 함께 할 것을 끈질기게 그리고 설득력 있게 설득한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을 만날 때는 경쟁에서 이겨 살아남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SKY대 중심으로 서열화 되어 있는 대학에서 일류 대학에 입학할 것을 요구하고, 학교에서 단 한명이라도 제쳐 등수가 오를 것을 요구하고,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청소년기 10여년을 일류대를 위해 희생할 것을 요구하는 학부모들 앞에서 우리의 자녀들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사측은 성과급제를 동원해서 노동자 상호간에 경쟁 할 것을 요구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 통치 하는 노동시장 유연화 공세를 반대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신자유주의 교육정책, 시장화 경쟁 교육에서 살아남을 것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는지 곰곰 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결국 자녀와의 대화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미성숙한 아이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서 그리고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동등하게 함께 투쟁하는 동지로서 만나는 것이 우리의 아이들을 위한 진정한 보호이며 부모로서의 책임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